뇌묵 처영 대사
관련사찰 : 금산사, 익산 숭림사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7년 간에 걸쳐 조선의 국토를 황폐화시켰다. 개국 이래 문관(文官) 중심으로 이루어진 국정은 상대적으로 국방의 약화를 초래하였고, 마침내 일본의 침략에 무방비로 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수없이 많은 문화유산이 약탈 파괴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민족의 강인한 저항의식은 곳곳에서 의병의 봉기로 이어졌는데, 여기에는 출가자인 스님도 예외가 아니었다. 서산(西山) 대사와 사명(四溟大師) 대사 등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던 조선의 국운을 되돌려 놓은 위대한 분이었다.
왜군이 거침없이 한양까지 밀려오자 선조는 의주로 몸을 피하고, 이때 서산 대사는 전국의 승려에게 총궐기할 것을 호소하는 격문을 보냈다. 전라도에서는 금산사를 중심으로 1,000여 명의 승병이 집결하였고 이들은 뇌묵 처영(雷默處英)의 지휘 아래 왜군에 맞서 싸웠다.
특히 스님과 권율(權慄) 장군이 함께 싸운 금산의 배고개 전투는 의승군의 대승리였다. 스님은 이후 권율 장군과 함께 북진하여 수원 독왕산성에 진을 치고 왜적의 공격을 물리쳤다. 또한 권율 장군이 행주산성에 주둔하였을 때는 700여 의승병을 이끌고 함께 참여하여 적병 2만 4,000명을 물리치는 최대의 수훈을 세웠다. 스님의 공적을 치하하여 조정에서는 절충장군(折衝將軍)이라는 직함을 내렸다.
스님은 이처럼 전란의 와중에서 의연히 일어나 불법의 정도(正道)를 몸소 실천하였지만 아쉽게도 자세한 생몰년이나 행장은 알려지지 않는다. 다만 어려서 금산사에서 출가하였고, 뒤에 서산 대사를 찾아가 선지(禪智)를 익혔다는 사실만 전한다.
한편 1794년(정조 18)에는 국가에서 서산 대사와 사명 대사, 그리고 스님의 진영을 해남 대흥사와 묘향산 수충사에 봉안하여 봄 가을로 제사를 올리도록 하였다.
<출처 : 현대불교 미디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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