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과 소승
불교에서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이상과 같이 불․법․승 삼보라고 하는 기본적 요소를 바탕으로 해서 모든 논리를 전개해 왔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앞으로 다룰 여러 가지 문제에서 제시 될 것이나 그에 앞서 약간 설명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 있다.
우리가 흔히 '불교'라고 한마디로 말하지만 구체적으로 한국 불교가 있고 스리랑카 불교가 있는 것과 같이 현실적으로 존속하는 교단은 그 내용이 각각 틀리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어떠한 입장에서 해석하는가는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불교, 즉 한국불교는 대승불교이다.
그러나 스리랑카 불교는 오늘날 장로 불교(또는 상좌부 불교)라고 불리우고 있다. 우리는 '불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상좌부쪽보다는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대답하는 것이 이해도 용이하고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나 대승불교라는 것은 근대불교학이 밝혀낸 성과에서 보면 부처님이 입멸한 지 5백년이 지난 때에 생겨난 일종의 개혁 운동이다. 그 가르침에 있어서도 결코 부처님이 직접 말씀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法)은 '아함'이란 이름으로 전해져 왔다. 대승불교에서는 아함을 무시한 것은 아니나 스스로 교리의 근거로써 이른바 '대승경전'을 소유했고 그것만이 부처님 가르침의 참뜻을 담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대승불교에서는 그들의 경전이 당연히 '부처님이 말씀(佛法)'한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그것은 결코 '불설'이 아니다. 즉 대승은 '비불설'인 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의 학문적 상식으로는 '대승비불설'은 당연하나 같은 방법의 연구에 의하면 실은 아함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온전한 불설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같은 아함이면서 한문으로 번역된 불전과 스리랑카 등 남방의 여러 불교권에서 사용되는 팔리어와는 약간의 상위가 있음을 근대불교학을 밝혀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역 중에서도 각기 다른 부파에 의해 전해진 경전이 혼재하고 가르침의 내용도 서로 다른 경우가 적지 않다.
이같은 현상은 불교가 부처님의 입멸이후 약 1백년 경부터 몇 개의 교단으로 분열하여 마침내는 20여 개가 넘는 부파를 형성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들 부파는 아함을 전승하는 과정에서 점차 독자적인 해석을 가하게 되어 어느 사이 부처님께서 가르친 내용과는 상당한 간격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대승불교는 종래의 이와 같은 부파교단의 학설이 부처님의 참뜻을 바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부처님의 입장에서의 복원을 목표로 새로운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대승불교가 '소승'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시 말해 '부파의 교설'을 지칭한다. 소승이라고 불리우는 의미 속에는 출가자가 자신들만의 깨달음을 목표로 수행하고 재가불자들을 돌보지 않는다는 비난이 포함되어 있다. 대승은 소승의 이러한 잘못을 지적하면서 출가․재가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이 함께 깨달음에의 길로 나가는 길이다. 그것은 대승불교운동 실천자(보살)의 입장에서 보면 이타적 실천, 즉 자기의 깨달음에 앞서 다른 사람을 먼저 깨닫게 하는 것이다.
부파의 교학은 아비달마라고 한다. 그 의미는 다르마 즉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그것을 연구하는 것, 바꿔 말하면 '법의 연구'이다. 이를 중국에서는 '대법'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각 부파는 불설인 아함을 연구하면서 자기들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해석을 독자적으로 했던 것이다. 이는 한편에서 보면 '불교학의 발전'이기도 했으나 부처님의 참뜻을 적지 않게 왜곡하는 결과를 빚기도 했다.
현재 우리들이 알고 있는 아비달마학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한역으로 전해진 것으로는 설일체유부의 교학이고, 다른 하나는 스리랑카 장로 불교에 전해진 팔리어 불전이다. 그 중 대승불교가 소승불교에 대해 비판을 가하기도 하고 영향을 받은 것은 유부의 교학이다.
유부의 교학을 알기 위한 대표적인 강요서는 바스반두(世親)가 쓴 ≪구사론(俱舍論)≫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당나라때 현장이 번역한 것이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책은 불교 강요서 또는 입문서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와 함께 ≪유식론(唯識論)≫도 많이 읽힌다.
세친은 대략 5세기경 사람으로 형은 아상가라는 사람이다. 세친은 처음에는 소승불교를 하다가(구사론은 소승교서다) 나중에 형을 따라 대승으로 전향해 ≪유식론≫을 썼다. 그러므로 ≪유식론≫고 ≪구사론≫은 대소승의 차이가 있으면서도 비슷한 점도 있다. 그러니까 유식의 학설은 '대승의 아비다르마'인 셈이다.
사실 대승교학의 뿌리가 소승교학에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관계로 우리나라에서는 자연히 ≪구사론≫의 입장에서 '불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불교를 알려고 할 때 학문적으로 부처님께서 직접 무엇을 어떻게 말했는가를 알고 싶은 욕구는 당연한 것이다. 때문에 최근의 불교학은 부파적 해석이 가미된 여러 가지 불교경전에서 공통항목과 공통된 교리를 모아서 재편성함으로써 어느 정도 부처님이 참으로 말하고자 했던 본뜻에 가까워져 가고 있다. 이러한 의도 아래 불교학자들은 부처님 시대의 불교 또는 부파로 갈려지기 이전의 불교를 '원시불교'라고 하며 다시 그 위에 가장 오래된 것을 '최초기의 불교' 또는 '근본불교'라고 부른다. 뒤에 발달된 불교를 '소승불교(또는 부파불교)' '대승불교'라고 부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소급하여 불교의 원초형태를 찾아내는 것만이 불교의 내용 전체를 바르게 해석하는 것인가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불교'라고 말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숱한 변모를 거친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조직과 제도를 가진 것을 통틀어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자면 역사적 엄밀성도 고려해야 하지만 불교가 불교로서의 체계를 확립한 시점을 기준으로 하고 그위에서 후대에 발전된 교리체계를 언급하는 것이 이해하기 편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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