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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종

by 정암 2011.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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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종

교종의 대표주자라 할수 있는 종파.
문무왕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중심으로 창종했다.
물론 화엄종은 의상이전에 이미 신라에 들어와 있었다.
자장과 원효가 화엄사상을 신라에 전파했던 것이다.

실제로 원효는 화엄경종요(華嚴經宗要)와 화엄경소(華嚴經疏)를 펴냈다. 그러나 체계적인 화엄교학이 뿌리를 내린 것은 의상부터라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의상을 해동화엄초조(海東華嚴初祖)라고 한다. 의상은 상문십덕(湘門十德)이란 화려한 제자군단을 두었다. 이러한 의상의 노력으로 화엄종은 화엄십찰(華嚴十刹)이란 메이저 사찰을 거느릴수 있었다. 그러다가 신라말에 이르러 정치적 대립이 격화되면서 분열의 시대에 접어 들었다. 관혜(觀惠)와 희랑(希朗) 두 법사가 견훤과 왕건의 정치적 후견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에 의해 화엄종은 남악파와 북악파로 분열되었다. 여기서 남악(南岳)은 지리산이고 북악(北岳)은 가야산이다. 그러나 고려가 건국되면서 탄문(坦文)과 균여(均如)같은 고승이 등장하면서 다시 통합의 시대에 접어 들었다.

화엄의 사상은 원만무애(圓滿無碍)다. 그래서 원돈교(圓頓敎)라고도 하고 원융교(圓融敎)라고도 했다. 또는 원융종이라고 했다. 이러다 고려 중기 13세기에 이르러 오교양종(五敎兩宗)이란 말이 나온다. 이때 천태(天台) 조계(曹溪) 양종과 신라의 오교에서 화엄종이 원융종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교세의 쇠락과 변화를 의미한다. 결국 억불숭유의 조선에 들어와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불교환경이 급변한다. 화엄종은 교종의 하나로 통폐합된 것이다. 그러나 불교사상에 있어서 화엄철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도 막대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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