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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교의 융성

by 정암 2011.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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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교의 융성

대승블교의 두 학파가 학문불교로서 변화해 가면서 초기의 신선함을 잃는 것과 함께 밀교(密敎)가 일어나 마침내 인도 불교의 주류를 이루었다.

밀교란 비밀불교란 뜻으로 주술적인 의례를 통해서 신비주의적인 교의를 설법하는 가르침이다.

이미 원시불교 무렵부터 인도 일반사상의 영향을 받아 주술적 요소가 불교에 침입해 특히 재가신자들 사이에서 그것을 배제하는 일은 불가능했었다. 재가신자들에게서 흥했던 대승불교에서는 더더욱 그런 경향이 심했다. 한편에서는 공과 같은 심오한 철학을 탄생시키면서도 경전은 대부분 다라니 따위의 주문을 설교했으며 그 효과를 가르쳤다. 부처님의 법신이란 이론도 이런 범신론적 경향에서 신비주의와 쉽게 결합하고, 오히려 신비주의적 해석 안에 불교의 구극적 입장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해서 대승불교의 새로운 해석이라는 형태로 밀교의 교의가 성립되었다. 그 시기는 7세기 경 최초로 나타난 《대일경(大日經)》과 때를 같이 한다. 조금 뒤에는 《금강정경(金剛頂經)》이 나타나 대승과는 다른 밀교의 특색이 명료해졌다.

밀교에서는 제불과 보살, 명왕(明王)의 세계를 묘사한 만다라(蔓陀羅)를 장식하여 그 앞에서 인계(印契)를 맺고 진언(眞言; 만트라)을 외우고 요가를 수행한다. 진언은 '주(呪)'라고도 해석되지만 '다라니(陀羅尼)'란 말로 그 속에서 부처님 가르침의 진언 수행을 실천의 주안으로 삼는 까닭에 밀교를 진언승(眞言乘)이라고도 한다.

밀교 독특의 요가가 발달함에 따라 그것에 부응해 그 교리와 예법이 상세하게 규정되고 여러 가지 유파도 생겼다. 금강승(金剛乘)이라든가 시륜승(時輪乘)등이 그것이다. 그 중에는 좌도밀교(左道密敎)라 불리우는 쾌락주의의 사도(邪道)까지 나타났다.

반야(般若)와 방편(慈悲)의 합치라는 이상경(理想境)을 반야는 여성, 방편은 남성으로 내세워 그 결합을 강조하는 것이다. 밀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법 즉 행(비밀행:三密)을 극기에 의해 단련하는 면이 적고 현실긍정적이기 때문에 일반인에게는 환영받았지만 동시에 타락의 위험도 내포돼 있었던 것이다.

후기 밀교는 그 성전을 '탄트라'라 칭하고 의궤(義軌)와 예법을 주요한 내용으로 했다. 탄트라란 말은 힌두교에서 성전이란 뜻으로 사용하던 말로 밀교에서도 사용됨으로써 밀교를 널리는 '탄트리즘'이라고도 부른다. 금강승의 좌도밀교는 힌두교의 탄트리즘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슬람교도가 북인도 각지에 침략을 개시했던 11세기 경 인도 불교는 밀교 일색이었으며 그것은 거의 힌두교와 구별이 안 되는 것이었다. 13세기 초 이슬람군대에 의해 벵갈지방의 대사원이 파괴되고 불교의 근거지가 상실되자 출가수행자와 학승들은 경전을 가지고 위난을 피해 네팔과 티베트로 갔다. 그리고 교단 조직의 붕괴와 함께 불교는 힌두교 속으로 흡수되었다. 이로써 인도불교는 마지막을 맞이하게 되었다.

관련글 : 구루사상 (guruvada)  만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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