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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달마(達磨): (?~528)

by 정암 2011.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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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達磨): (?~528)

범어로 <보오디.다르마>.

선종의 중국 초조로 세존. 가섭.아란으로 전하여 내려오는 불조법통의 제28대 조사가 된다. 남인도 향지 국 제3왕자로 본명은 <보리다라>라 하였다.

<반야다라>존자에게 도를 배우며 40년 동안을 섬기다가 <반야다라>가 죽은 뒤 본국에서 크게 교화하여 당시 성 행하던 소승선관의 육종(六宗)을 굴복시켜 전인도에 그 이름을 떨치고 60여년 을 교화하였다. <반야다라>가 법을 전할 때 "내가 죽은 후 67년이 되면 네가 동방으로 가서 대법을 선양하라. 부디 속히 가려고 서두르지를 마라. 남방에 는 유위공업(有爲功業)이나 좋아하고 불리(佛理)는 보지 못하니 그곳에는 머 물지 마라. 동토에는 보리를 이룰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하셨는데, 사 조카 이견왕(異見王)을 교화하고는 마침내 바다길로 중국을 향하여 3년만에 양(梁)나라 보통(普通)1년(서기520)9월 광주(廣州)에 이르러 10월에 금릉 (金陵)으로 가서 무제(武帝)와 만났다.

무제가 묻기를,

"화상은 서천에서 무슨 교법을 가지고 오셨읍니까?"

"한가지 의 교법도 가져 오지 않았습니다."

"짐이 많은 절을 짓고 탑을 쌓고 중을 득 도시켰는데 어떤 공덕이 있읍니까?"

"조그마한 공덕도 없읍니다."

"왜 그렇습 니까?"

"그것은 인천(人天)의 작은 복이니 유루(有漏)공덕이 될 뿐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참 공덕입니까?"

"맑은 지혜는 묘하게 밝아 뚜렷이 비치어 있을 뿐이라 세상의 함이 있는 일(有爲之事)로는 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거룩한 법의 첫째가는 도리입니까?"

"훤칠하여 거룩한 것이라곤 없는 것입니다."

"짐을 대하고 있는 이는 누구입니까?"

"모르겠습니다."

무제는 이 문답에서 알아듣지 못하였다.

달마는 양자강을 건너 위(魏)나라 숭산 (嵩山)으로 갔다.

사(師)가 떠난 뒤에 무제는 지공대사에게서

"그분이 바로 관음보살이라"는 말을 듣고 급히 뒤쫓아 모셔 오라고 하였으나 지공대사는 온 나라 사람이 다가도 오지 않을거라고 말렸다.

그뒤 사는 소림사(少林寺)석굴 에 9년동안 면벽하고 있었으므로 세상에서는 벽관바라문(壁觀婆羅門)이라고 불렀다.

이락(伊洛)에 있던 신광(神光)이 도를 구하여 소림굴 밖에 이르렀다.

신광은 박학군람(博學群覽)하고 불, 유, 선의 깊은 이치를 통달한 이름난 달승(達 僧)이었다. 물론 달마는 면벽단좌하고 만나주지 않았다.

신광은 "옛 사람은 도를 구하 기 위하여 뼈를 부수고 골수를 내며, 피를 뽑아 굶주림에 먹이고, 머리를 풀어 진흙을 덮었으며, 절벽에서 몸을 던져 호랑이에게 먹였는데 나는 또한 무엇하는 거냐!"하고 마침내 눈이 펑펑 내리는 12월 9일밤, 무릎을 넘는 눈속에 합장하고 서 있었다.

날이 밝아 해가 높이 떴을때야 달마와 이야기할 수 있었다.

달마가 신광을 돌아보고

"네가 밤새 눈 속에 서 있어 무엇을 구하는 것 이냐?"

신광은 눈물을 비오듯 흘리며 말하였다.

"원하옵건데 화상이시여, 자비 를 베푸시어 감로문(甘露門)을 열어 주십시요."

"제불(諸佛)의 무상묘도(無上妙道)는 광겁으로 정근하여 행하기 어려운것을, 능히 행하고 참을 수 없는 것 을 능히 참아야 하는 것인데 너는 어째서 소지소덕(小智小德)과 경만심(輕慢 心)으로 대법을 바라보고 헛고생이나 하는 것이냐!"

신광은 즉시에 자기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허물을 통절히 뉘우쳤다.

그리고 즉시에 칼을 빼어 왼쪽 팔을 탁! 치니 팔은 동강 잘라졌다.

이 순간 홀연히 눈 속에서 파초가 솟아올라 그 팔을 바쳤다고 한다.

달마는 이것을 보고 "제불의 최초구법이 모두가 법을 위하여 몸을 돌보지 않았는데 네가 또한 이러하니 가히 도를 구할만 하다."하고 드디어 이름을 혜가(慧可)로 고치게 하였다.

혜가가 "제불의 법인 (法印)을 얻게하여 주십시요."하자 달마는 "제불의 법인은 남에게서 얻는 것 이 아니다." 하였다.

그 당시 혜가는 과연 알 수 있는 것은 다 알고 배울 수 있는 것은 다 배웠으나 마음속에 차지하고 보채고 있는 인간 불안은 어떠한 지식이나 배운 것으로는 해결은 커녕 더욱 그 마음의 불안은 더하여 갔던 것 이다.

그래서 그는 그 지혜총명과 박학강기로는 어찌할 수 없는 마음속 "한 물건"의 해결을 구하고자 물었다.

"화상이시여, 저의 마음이 아직 편안치 않습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주십시요."

"좋다, 그러마. 너의 마음을 이리로 가져오너라."

"마음을 찾아 보아도 얻을 수가 없읍니다."

"내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마쳤다." 하였다.

위(魏)나라 효명(孝明)황제가 사의 이적을 듣고 크게 경앙하여 세번이나 청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였고 예물도 세차례나 사양하였으나 마침내 막지 못하고 마납의(摩衲衣) 가사(袈裟) 두벌, 금발우(金鉢) 은수병(銀水甁)과 비단만 받았다.

소림사에서 9년동안 있다가 하루는 문인을 불러서

"이제는 내게 때가 왔다. 너희들은 각기 소득을 말해보라."하시니 이미 사의 세연이 다하여 온 것이다.

그때 도부(道副)가 나와서

"문자는 취할것도 없고 버릴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하니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하고,

다음에 비구니 총지(總持)가 나와서

"제가 본바로는 <아란>이 아촉불국을 한번 보고는 다시 보지 못한것과 같습니다."하니,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하고,

도육(道育)은 "사대(四大)는 본래 공했고 오온(五溫)도 본래로 있는 것이 아니오니 제가 본 바로는 한 법도 가히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하니,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하였는데, 혜가는 나와 다만 예배하고 물러가 제자리에 서니,

"너는 나의 골수를 얻었다. "하고, 이어 말하기를

"여래께서 정법안장(正法眼藏)을 가섭(迦葉)존자에게 전하신 후 전전히 전하여 내려와 지금 나에게 와 있다. 이를 이제 너에게 부치니 잘 호지하라. 그리고 가사를 너에게 전하니 법의 신(信)으로 삼고 그 뜻을 잘 알아 두어라. 의발은 내가 죽은지 2백년 뒤에는 전하지 마라. 그때는 법이 천하에 퍼져 도에 밝은 자는 많고, 도를 행하는 자는 적으며, 이치를 말하는 자는 많고 이치를 통한자는 적을 것이며, 비밀한 이치에 계합하고 도를 통한 자가 천만인이 넘을 것이니, 너는 마땅히 이 법을 천양하되 깨치지 못한 자를 가벼이 여기지 마라. 그들이 한생각 기틀을 돌이키면 본래로 도를 얻은 자와 같은 것이다."하고 게송으로 이르기를,

"내가 이땅에 온것은 법을 전하여 중생을 제도하려는 것이니, 한 꽃이 다섯잎이 피면 결과가 자연히 이 뤄지리라(吾本來玄土 傳法救迷情 一華開五葉 結果自然成)"하고 또 이르기를,

"나에게 능가경(楞伽經) 4권이 있으니 이를 너에게 부친다. 이경은 곧 여래심지(如來心地)의 요문이니 여러 중생을 가르쳐 깨달아 들어가게 하라."하였다.

그 당시 광통율사(光統律師), 보리류지(菩提流支) 3장등 집상(執相) 학자들은 사를 시기하고

법을 이해하지 못하여 다섯번이나 음식에 독약을 넣었으나, 그 때마다 번번이 토하여 무사하였는데, 여섯번째는 법은 이미 전했고 때는 왔다 생각하고 그 대로 두어 마침내 앉으신채 입적하니 웅이산(熊耳山)에 매장하였다. 위나라 효장제(孝莊帝) 영안(永安)원년 10월 5일이다.

그 후에 위나라 사신 송운(宋雲)이 서역(西域)에 갔다 오다가 총령(蔥嶺)에서 달마대사가 맨발로 신 한짝을 들고 가는 것을 만나보고 와서 그 묘를 파보니 신 한 짝만 남기고 전신탈거하였더라고 한다.

사의 저술이라 전해지는 혈맥론(血脈論), 파상론(破相論), 사행론(四行論), 오성론(五性論), 심경송(心 經誦), 안심법문(安心法門)등이 있어 지금의 종문교전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이 달마전에는 이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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