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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진표 율사(眞表律師)

by 정암 2012.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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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표 율사(眞表律師)

관련사찰 : 금산사

진표율사는 불교계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문화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야 할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율사에 대한 기록은 극히 빈약하여 일연(一然)이 쓴 『삼국유사(三國遣事)에 의지할 수 밖에 없음이 안타깝다. 뿐만 아니라「삼국유사」의 기록 가운데 진표율사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소상한 「진표전간(眞表傳簡)」과 「관동풍악발연수 석기(關東楓岳 淵數 石記)」의 기록이 차이가 있다.

금산사(金山寺)를 중창(重劍)하여 신라시대 오교구산문(五敎九山門)의 하나인 법상종(法相宗)을 창종(創宗)하여 중생교화에 크게 공헌했다.

백제 법왕(法王) 원년(元率) 창건(創建)될 당시만 하더라도 금산사는 아주 작은 사찰(寺刹)에 불과했다. 그런데 진표 율사가 금산사를 크게 짓고자 발언하면서 금산사는 대 가람으로 발전한 것이다.

진표 율사는 서기 762년부터 신도들에게 권하여 16척의 미륵보살을 조성하고, 미륵보살이 내려와서 계법(戒法)을 주는 모양을 금당(金堂)남쪽 벽에 그렸다. 그리고 미륵보살상은 서기 764년 6월 9일에 완성하여 서기 766년까지 5년동안 금산사를 대 가람으로 중창한 것이다. 지금도 금산사  미륵전(彌勒殿)에는 삼존불(三尊佛-미륵존불, 大好相菩薩, 法華林菩薩)이 봉안되어 있다.

이 밖에 첫째, 속리산 법주사(法住寺)를 그 제자들로 하여금 중창하도록 했고, 둘째, 금강산 발연사(銶淵寺)를 창건하고, 셋째 제자들로 하여금 팔공산 동화사(八公山 桐華寺)를 중창하여 법상종풍(法相宗風)을 선양시켰으며, 넷째, 영심(永深), 보종(寶宗), 신방(信芳), 체진(體珍), 진해(珍海), 진선(眞善), 석충(釋忠) 등 많은 제자들이 불법을 깨닫도록 가르쳐 모두 산문(山門)의 개조(開祖)가 되게 하였으며, 다섯째, 보살계(菩薩戒)를 받고 경덕왕(景德王)이 내린 곡식 칠만 칠천석과 비단 초백단(端), 황금 오십 냥을 여러 절에 나누어주어 불사(佛事)를 크게 일으켰다..

[진표율사 설화]

진표는 어려서부터 활쏘기를 매우 좋아하고, 또 활솜씨가 뛰어났다. 그래서 늘 활을 들고 들과 산을 누비며 사냥을 하였다. 어느 봄날, 사냥을 다니던 진표는 논둑에 앉아 쉬다가 개구리를 잡았다.

그 개구리를 버들가지에 메어 물에 담가 두고 산으로 가서 사냥을 하였다. 그리고는 개구리는 까맣게 잊은 채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다.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 이듬해 봄이 되었다.

예나 다름없이 사냥을 하러 가던 진표는 구슬프게 우는 개구리 소리를 들었다. 문득 지난해의 일이 떠올랐다. 그래서 걸음을 재촉하여 그 자리로 가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개구리가 버들가지에 꿰인 채 울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어찌 먹기를 위하여 해가 넘도록 이런 고통을 받게 했단 말인가.」

진표는 크게 놀라 뉘우치면서 탄식했다. 그래서 불도에 뜻을 두고 결국 금산사로 가서 스님이 되었다는 전설이 그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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