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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

결집

by 정암 2012.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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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집

부처님이 입멸하자 제자들이 가장 서둘러 한 것은 가르침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부처님이 45년간 여러 곳에서 행한 설법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잘못 전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또 교단의 계율문제도 빨리 정리하지 않으면 제멋대로 해석하고 행동할 우려도 없지 않았다.

계율문제는 부처님이 입멸한 지 일주일만에 심상치 않은 조짐이 일어났다. 장로 마하카사파와 함께 유행을 하던 제자들은 부처님의 부음을 전해듣고 한결같이 비통해 했으나 한 늙은 비구는 '슬퍼할 것 없다. 지금까지는 이것은 해도 된다. 저것은 해서 안 된다는 식으로 억압을 받았지만 이제부터는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하고 하기 싫은 것은 안해도 좋게 되었다.'고 했다는 것이다.

원래 비구는 출가자이기 때문에 엄격한 수행생활을 각오하고 나선 사람들이다. 그러나 교단이 커지고 수행자가 많아지게 되자 개개인의 자각만으로는 통제가 어렵게 되었다. 개중에는 수행이 부족하고 자각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비행을 저지르도 했다. 그때마다 부처님은 그것을 금지하는 규제조항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반했을 때는 벌칙조항도 생겨났다. 그러나 이러한 계율은 수시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제자들 모두가 부처님이 정한 계율을 알 수도 없었고, 어떤 사람은 계율자체를 번거롭게 생각했을 것임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교법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에는 성자의 가르침을 귀로 듣고 마음속에 새겨두는 것이 전부였으며 기록으로 남겼던 것은 아니었다. 경전이 확실하게 문자로 쓰여진 것은 B.C.1세기 중엽의 일이었다고 스리랑카의 자료는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장례가 끝난 뒤 장로 마하카사파의 주재로 법과 율에 대한 정리․종합․확인하는 결집을 한 것은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결집은 불멸 후 네차례가 행해졌는데 첫 번째는 부처님이 열반에든지 백일이 채 못되어 라자그리하(왕사성)의 칠엽굴에서 있었다. 이때 마하카사파는 사회자가 되고 아난다는 '법'에 대해, 우팔리는 '율'에 대해 각각 '나는 이렇게 들었다(如是我聞).'로 시작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암송해 냈다. 참가자들은 아난다와 우팔 리가 외워낸 법과 율을 정정하여 확인한 후 모두 함께 합송했다. 결집을 상기티라고 하는데 이는 대중이 함께 '합송'했다는 뜻이다.

불교역사상 최초로 행해진 이 1차 결집에서 어떠한 교법이 결집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여러 문헌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뒤에 '구분경'이나 '5부'로 경전이 정리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원래의 소재가 모아졌다는 사실만은 인정해도 좋을 것이다.

최초로 결집된 교법과 계율은 워낙 방대한 분랸이므로 모두가 암송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이를 암송하는 전문화된 능력이 요구되었다. 이를테면 지율자, 지법자, 설법자, 지모론자, 지론자, 지경자 등의 이름이 알려져 있는데 이는 법과 율을 전문적으로 암송하고 해설하고 봉지한 사람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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