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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1864-1933 )

by 정암 2012.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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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1864-1933 )

스리랑카의 거사, 본명은 데이비드 헤와비타르네. 父는 무달리야르 다르마팔라이며 母는 말리카.

부모의 간절한 기도 속에 태어나 6세에 가톨릭 신학교에 입학하여 성서를 공부하면서도 항상 5계를 지켜나갔다. 1878년 콜롬보북부의 성공회부설 ‘성토마스 학교’에 입학했다. 매년 ‘베사크 祭日’마다 학교에서 도망나와 봉축행사에 참석하다. 그는 논쟁에 탁월한 재주를 가져서 독선에 찬 기독교도와 논쟁하기를 즐겼다.

 더우기 코타헤나 사원의 ‘메게투바테 구나난다’스님에게 토론과 웅변을 배웠다. 그뒤 1875년 뉴욕에서 설립된 신지학회(러시아인 H.P.Blavatsky女史와 미국인 변호사 Henrys,Olcott대령, 변호사 W.Q.Judge가 창립한 과학과 종교, 철학을 통합한 세계관의 제시를 목적으로 하는 사회단체)에 관심을 가지다가, 1880년 5월 스리랑카에 온 두 設立者가 불교로 改宗하면서 인연맺게 된다. 1884년부터는 일생을 집을 떠나 佛法의 守護와 繁榮을 위해 노력하는 Brahmachari가 되었다.

 1899년 다르마팔라는 日本을 방문하는 등 세계불교의 흐름에도 관심을 가지면서 1891년 인도불교성지순례를 결심하고 일본인 승려 코젠구나 라트나와 함께 바라나시, 사르나트에 도착한다. 그는 이때의 심경을 일기에,‘애석하도다. 이 聖地에 사는 불교인 누구도 파괴자들의 손으로부터 사리탑과 조각품들을 보존하는 사람이 없다니---’라고 쓰고 있다. 부다가야에서 그는 “인도에서 불법의 횃불을 다시 점화시켜 성지를 회복하리라”고 마하보디 大塔 앞에서 誓願하고는 Mahant(힌두교 고위성직자)의 소유가 된 大覺寺를 찾는 일에 착수하였다. 1891년 3월 콜롬보에서 ‘부다가야 마하보디협회’를 설립하고 이듬해 ‘마하보디저널’을 창간하여 세계에 알리기 시작하였다.

1893년 시카고에서 ‘세계종교대회’가 열렸을 때 議長인 버로우博士의 초청으로 명연설을 하여 불교를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편견없이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십시오. 여러분의 확신을 주저없이 말하고 청정한 삶을 사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추구하는 진리의 길을 神學과 敎理가 막는다면 얼른 치워버리십시오. --- ” 그는 이 연설을 통하여 많은 후원자를 얻었는데 그 중에도 뉴욕의 스트라우스(미국 최초의 불교도)와 메어리 포스터부인(하와이 카메하메하大王의 직계후손)을 만나게 된다. 인도에 도착한 그는 다시 마한트와 협상과 소송을 번갈아가며 한 결과 부다가야의 사원이 힌두교의 소유가 아니라는 판결에 힘을 얻어 1896년 5월 26일 켈커타에서 ‘베사크 祝祭’를 개최하였다. 그는 가끔 에드윈 아놀드(‘아시아의 빛’의 저자), 막스밀러박사(옥스퍼드대학의 동양학교수)와 교류하며, 또 대중설법에서 항상 ‘신성하고 청정한 생활’을 권하였다.
 
 그의 일상은 항상 요가수행과 [염처경] [청정도론]의 연구와 규칙적인 禪修行, 계율생활이 기본이 되었다. 그의 지칠줄 모르는 활동의 信條는,‘죽음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과거에 나는 이미 백만번도 더 죽었고 앞으로도 백만번은 죽을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을 無知와 利己心,激情의 惡으로부터 건져내리라’라고 하였다. 올코트 대령이 사망한 것을 계기로 신지학회에서 벗어나 1899년 다시 인도에 가서는,‘신의 섭리가 그대들을 돌보리라 생각하지 말라. 全能者는 천년세월이 한시간에 불과할 뿐이다. 합장하고 기다린들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깨어나라 나의 형제들이여 ---’

1906년 부다가야 소송은 敗訴로 끝났으나 힌두교와 불교 공동관리하에 두는 成果는 있었다. 1913년 49세의 다르마팔라가 8월에 한국을 방문하여 宗務院長 金錦潭스님에게 ‘석존사리 1과’를 전하였다. 그는 영국에도 불법전파활동을 벌여 1925년 가을 런던에서부터 講演과 座談을 벌이고 ‘The British Buddhist'지를 창간하였다.

 1931년 모든 財産을 정리하고 7월 出家戒를 受持하고, 캘커타에 ‘물다간다쿠티 寺院’의 開院式을 열다. “8백년동안의 流配 끝에 불교도는 이제 神聖한 鹿野苑으로 돌아왔습니다. ---” 1932년 1월 실론에서 具足戒를 받았으나 건강이 워낙 악화되어 갔다. “나의 죽음을 막으려 애쓰지 말라. 藥이나 注射로 나의 고통을 더이상 연장시키지 말라. 나는 죽어 베나레스의 브라흐만 집안에 還生하여 佛陀의 法을 전파하고 부다가야 聖地를 되찾으리라” 1933년 4월 29일 승려와 제자들의 涅槃經 독경 속에 70세로 入寂하다. 그의 일생은 한마디로,‘성실한 열정과 護法佛事, [인도불교의 復興]를 위한 끝없는 정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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