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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육왕(阿育王)

by 정암 2011.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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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육왕(阿育王)

梵語 <Asoka>의 音譯. 인도 마우리아왕조의 제3대 왕(재위 BC 272?~BC 232?). 한역불전(漢譯佛典)에는 아육왕(阿育王)․아수가(阿輸迦)로 기록되어 있다.

 할아버지 찬드라굽타(旃多掘多大王)와 아버지 빈두사라(賓頭沙羅)의 2대에 걸쳐 구축한 영토를 계승하고, 남쪽으로는 마이소르에 이르는 인도의 대부분과 아프가니스탄의 남부를 지배하여 인도 고대사상 최대의 제국이 되었다. 그 도읍은 파탈리푸트라(지금의 비하르주 파트나)였다. 갠지스강 중류지역의 농업지대를 제국의 경제적 기반으로 했으며 당시 상당히 발달되었던 여러 지대를 연결하는 교통로와 무역을 손안에 넣었다. 즉위 9년째에 카링가(지금의 오리사주 해안부)를 정복하였는데 그때 많은 사람을 죽였다.

 왕은 이 전쟁의 비참함을 반성하여 불교를 더 열심히 신봉하였으며 국중에 팔만사천의 절과 팔만사천의 보탑(寶塔)을 세웠으며, 무력에 의한 정복을 중지하고 다르마(法)에 바탕을 둔 정치의 실현을 결의하였다. 이 정치는 인민의 현세 및 내세에서의 행복과 안락에 중점을 둔 것이었는데, 왕은 백성에게 모든 인간이 지켜야 할 윤리를 가르쳤다.

 인간이 개인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로서는 마음을 청정․평정하게 가지고, 욕심을 줄이고 절제하는 자세를 지니며 진실을 말하고 자비와 보시(布施)의 마음을 간직하여 생물을 살생하지 않는 것이다. 사회윤리로서는 부모․웃어른․스승과 친족에 대해 순종하며, 친족과 친구, 바라문과 종교, 노예와 고용자를 올바르게 취급하는 것이다. 그는 이 다르마의 실현을 지향하여 정력적으로 노력하였다. 언제 어디서나 정무(政務)를 들어서 처리하고, 스스로 영역 안을 순찰하였으며 또 관리를 시켜 5년마다 관할구역을 순회하여 백성이 법을 준수하는지의 여부를 시찰하게 하였다. 그리고 불교에 귀의한 왕은 석가모니의 탄생지 등을 방문해서 스투파를 증축하고 불교 교단 내의 화합을 도모했으며 분쟁을 엄하게 경계하였다. 또 즉위 17年에 화씨성(華氏城)에서 불전(佛典)의 제3결집(第三結集)을 하고 재위 26年 동안에 26회나 특사를 내리는 등 정법을 융성케 하였다. 그밖에 종교교단에 대해서도 보호를 하고 관용을 주장하였다. 또한 여러 종교 교단을 관장하는 특별관리를 임명하였고 백성을 위해서 도로를 건설했으며, 수목을 심고 우물을 파거나 인간과 동물을 위한 병원을 세우는 등의 사회사업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왕이 영토 안의 각지에서 돌기둥이나 암석에 새긴 조칙(詔勅)에 기록되어 있는 것들인데, 그중에는 아프가니스탄의 칸다하르에서 발견된 그리스어와 아마르어로 된 것도 있다. 그는 이 정치이념을 이웃 여러 나라, 여러 민족에게까지 전도했는데, 그 사절은 이집트와 마케도니아에도 미쳤다. 왕의 정책은 36년에 이르는 통치 뒤에는 쇠퇴하였지만, 그의 치세 동안에 불교를 비롯하여 갠지스강 중류지역의 고도의 문화가 여러 지방에 급속히 퍼짐으로써 여러 지방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또 불교도는 그를 보호자로 받들고 이상적인 왕으로 존중하여 많은 설화를 만들었다.
(아육전 제1 · 대당서역기 제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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