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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원명국사(圓明國師)

by 정암 2012.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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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명국사(圓明國師)

원명국사(圓明國師)는 1090년(선종7)에 숙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숙종이요, 어머니는 명의(明懿)태후 유씨이다. 그의 처음 이름은 징길인데, 예종 때에 송 나라와의 휘를 피하여 징엄이라고 그 휘를 바꾸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불교에 대한 특이한 소질이 있었다. 그리하여 1097년(숙종2)그의 나이 8세가 되던 해에 경남의 흥왕사에서 대각국사에게서 법을 받고, 다음 해에는 명?에서 삭발 을 하고, 불일사에서 계를 받았다. 이로부터 그는 학문에 더욱 열심히 매진하였다. 그리하 여 1102년(숙종7)에는 부왕 숙종에 의하여 동광전에 주석하였으며, 1105년(숙종10)에는 부 왕으로부터 승통의 법계와 복세라는 법호를 받게 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 겨우 16세가 되 던 해였다.

예종이 왕위에 오른 다음인 1106년부터 1114년까지는 홍원사, 개봉사, 귀신사 등에 주석 하였고, 1115년(예종10)에는 왕명을 받아 흥왕사로 그 주석을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다 음 해에 질병으로 인하여 흥왕사의 주석을 사양하고 ?에 옮겨 있다가, 1121년(예종16)에 다시 귀신사로 옮기게 되었다.

인종이 즉위하면서 조칙을 내려 그에게 오교도승통을 수여했으나, 1126(인종4)에 귀신사로 다시 물러나 앉게 되었다. 이 때 궁중에서는 외척의 집권으로 인하여 왕실이 매우 위태로 운 지경에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도승통의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간청하였고 왕은 그 뜻 을 받아 들여, 중사로 하여금 그의 가는 길을 돌보게 하였다. 당시의 왕실은 훌륭한 신하 와 간신이 서로 어려움이 미치지 않았으므로 그 당시의 사람들이 국사는 선견지명이 있다 고 모두 탄복하였었다.

인종은 종실의 환란이 진정된 뒤에 다시 중사를 그에게 보내어 개경의 흥왕사에 주석케 하고 백숙(伯叔)의 예우로 대하여 그로 하여금 평생을 통하여 천태의 종풍을 크게 진작시키 게 하였다. 국사는 1141년(인종19) 1월에 그의 제자들을 모아놓고 입적의 시기를 미리 알린 다음, 같 은 해 4월 12일에는 약간의 병색을 느꼈고, 4월 18일에는, '큰 태양이 땅에 떨어지려는 것 을 손으로 받쳤다'는 꿈 애기를 그 제자들에게 알린 뒤, 4월 21일에 입적하였다. 입적한 뒤 에도 국사의 얼굴색은 평상시 생존했을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향년 52세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애도하여 3일간 어전회의를 폐지하고, 스님을 국사로 책봉하고 시호를 원명이라 하였다. 장례는 옛 대각국사의 전례대로 행하여 4월28일에 흥왕사의 서쪽 천덕사의 남록에서 다비를 하고 그 유골을 모아 5월 23일 승천부 약산촌 북원에 안장하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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