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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조도일6

장경회휘(章敬懷暉,754-815) 장경회휘(章敬懷暉,754-815) 唐代(당대) 南岳下(남악하_, 泉州(천주 복건성) 同安縣(동안현) 사람, 성은 謝(사)씨. 貞元初(정원초)에 洪州(홍주) 馬祖(마조)를 배알하고 心要(심요)를 얻은 후, 濟州(제주 산동성) 靈巖寺(영암사)에 寓居(우거)하다가 定州(정주 하북성) 百巖寺(백암사)에 주하며 禪法(선법)을 폈다. 元和3년(원화 3년 808) 勅令(칙령)에 의해 京兆府(경조부 장안) 章敬寺(장경사)의 毘盧遮那院(비로자나원)에 주하다가 元和(원화)10년 12월 62세로 示寂(시적). 시호는 大覺禪師(대각선사), 賈島(가도)가 碑文(비문)을 權德輿(권덕여)가 碑銘(비명)을 지었다. (全唐文(전당문)501‧唐故章敬寺百巖大師碑銘幷序, 조당집14, 송고승전10, 전등록7) 관련글 : 마조도일(馬祖道一 7.. 2012. 12. 15.
단하천연(丹霞天然,739-824) 단하천연(丹霞天然,739-824) 당대 (唐代) 스님, 석두희천(石頭希天)의 법사(法嗣). 그는 장안(長安)에 관리가 되려고 갔다가 한 선승을 만나 마조(馬祖)에게 찾아가서 승려가 되다. 그 후 석두의 법을 잇다. 그가 낙양(洛陽)의 혜림사에 머물 때 추운 겨울날 법당의 목불(木佛)을 꺼내 불을 지폈다.(단하소불 丹霞燒佛) 그 때 원주(院主)왈, ‘그럴 수가 있느냐?’하니 사(師)가 ‘나는 부처님을 태워서 사리(舍利)를 얻으려고 하오’ 원주,‘목불인데 어찌 사리가 있겠는가?’ 師왈,‘사리가 안나올 바에야 나무토막이지 무슨 부처이겠는가?’하다. 말년(末年)에 그는 등주(鄧州) 단하산(丹霞山)에 살다가 86세에 門人들에게 목욕하게 하고 갓쓰고 지팡이를 들고 나앉으며,‘ 자 나는 간다. 신을 신켜다오’하고 신.. 2011. 11. 20.
홍주종 홍주종 6조 혜능의 걸출한 제자중의 한 사람인 마조도일(馬祖道一)이 개창한 불교종파. 홍주종의 종명은 마조가 홍주(洪州) 개원사(開元寺)에서 오래 주석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홍주종의 사상은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라는 마조도일의 말에 함축된다. 도(道)는 추상적이고 요원한 세계가 아니라 아주 일상적이고 비근한 곳에 있다는 것이다. 홍주종의 실용적 사상은 현실긍정으로 이어졌다. 실제적인 중국인의 기질과 맞아 떨어진 것이다. 홍주종은 마조(馬祖)의 뒤를 이어 백장(百丈) 황벽(黃檗) 임제(臨濟)로 이어지는 중국 선종의 발원지가 된다. 관련글 : 임제종(臨濟宗) 2011. 4. 22.
성주산문 성주산문 신라 문성왕때 고승 무염(無染)이 충남 보령 성주사(聖住寺)에서 개창한 산문. 무염은 태종 무열왕의 8대손인 왕족이었다. 무염은 821년 당나라에 가서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인 마곡보철(麻谷寶徹)에게 법을 배웠다. 그때 중국 사람들은 그를 동방대보살(東方大菩薩)이라고 추앙했다. 845년 귀국하여 왕자 흔(昕)의 요청을 받고 오합사(烏合寺)에 자리를 잡았다. 이 오합사가 후일 성주사(聖住寺)로 바뀐다. 무염은 경문왕과 헌강왕으로부터 국사로 받들어 졌다. ‘무설토론(無舌土論)’을 지어 선풍을 크게 떨쳤다. 무염의 제자로는 심광(深光) 현휘(玄暉) 활행(闊行) 대통(大通) 등이 유명하다. 관련글 : 구산선문(九山禪門) 희양산문 사굴산문 가지산문 수미산문 실상산문 사자산문 2011. 3. 11.
실상산문 실상산문 구산선문중의 하나로 신라 흥덕왕때 홍척(洪陟)이 전북 남원(南原)에 실상사(實相寺)를 창건하고 세운 산문(山門)이다. 홍척은 당나라로 건너가 유명한 선승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인 서당지장(西堂智藏)에게서 법을 배웠다.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종조(宗祖)인 도의(道義)와 같은 스승밑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도의보다 늦게 귀국했다. 하지만 도의보다 먼저 산문을 열었다. 구산선문 중 제일 먼저 테이프를 끊은 영광을 얻은 것이다. 2011. 3. 8.
조사선(祖師禪) 조사선(祖師禪) 인도의 선보다 달마선이 뛰어나다하여 여래선(如來禪)이라는 말이 생겼으며 그 중에서 특히 질적으로 높은 것을 조사선이라 부른다. 이 명칭은 당나라 후기에 나타났지만 기초를 만든것은 하택신회(何澤神會)와 마조도일(馬祖道一)계통의 선사들이다. 말 자취와 생각의 길이 함께 끊어져 이치나 일에 다 걸림이 없는 것이 마치 인장을 허공에 찍은 것과 같다고 비유하였다. 2011. 3.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