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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쇠퇴기

by 정암 2011.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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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쇠퇴기

고려일대를 통해 왕실의 보호에 힘입어 극성(極盛)하던 불교는 조선왕조의 출현과 함께 급속하게 몰락의 길을 걸었다.

조선왕조의 척불(斥佛)은 기본적으로 주자학으로 무장된 양반관료들이 이념적 측면에서 배척한 데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볼 때 고려말기에 이르러 사원경제의 비대화와 승려의 타락등이 새 왕조의 양반관료들로 하여금 불교를 배척케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조선왕조는 처음부터 극렬한 배불(排佛)을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태조는 한양에 도읍을 정하는 일과 불교재건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흥복․흥왕․흥덕사의 창건, 법회의 개설과 인경(印經)사업 등을 국가재정으로 지원했을 정도다. 이에는 무학(無學)과 조구(祖丘) 같은 고승들의 활동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불교계 전체는 오랜 폐습 때문에 새 왕조의 출현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 결과는 3대 태종의 즉위와 함께 무서운 법난(法難)으로 나타났다. 태종은 의정부(議政府)의 상서에 따라 고려이래 내려오던 11종파를 조계(曹溪)․천태(天台)․화엄(華嚴)․자은(慈恩)․중신(中神)․총남(摠南)․시흥(始興) 7종으로 통폐합하고 각 종파의 소속사찰을 극히 제한했다. 또 사찰소유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여 사원경제를 파탄으로 몰아 넣었다. 태종은 이밖에도 도첩제도를 필요이상으로 엄격하게 시행하여 일반사람들이 승려가 되는 길을 봉쇄했다. 또 고려 이래의 제도이던 왕사․국사제도를 폐지함으로써 승려의 사회적 지위를 격하시켰다.

이같은 척불법난(斥佛法難)은 세종대(世宗代)에도 계속돼 조계․천태․총남종을 묶어 선종(禪宗)으로, 화엄․자은․중신․시흥종을 묶어 교종(敎宗)으로 다시 축소 조정했다. 또 승록사(僧錄司)를 폐지하고 양종의 도회소에서 사무를 관장케 했다. 세종은 만년에 호불(護佛)로 돌아섰으나 어디까지나 개인적 신앙일 뿐이었다.

왕조에 의한 척불로 급속히 몰락하던 조선불교는 세조대(世祖代)에 이르러 반짝 소생의 기운을 찾았다. 세조는 새로 지은 원각사에 간경도감을 두고 한글로 번역한 《법화경》《금강경》《원각경》《능엄경》등을 간행했고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석보상절(釋譜詳節)》을 묶어 《월인석보(月印釋譜)》 간행했다. 또《경국대전》에 도승법(度僧法)과 선시(選試)제도를 확립해 불교입문의 문호를 넓혔다.

그러나 조선왕조 전체를 통해 볼 때 불교사는 한마디로 수난의 연속이었다. 연산군 중종대(代)를 거치는 동안 불교는 완전히 몰락하고 승려는 사회로부터 격리된 별도의 하층신분 집단으로 전락된 상태였다. 국가는 승려를 동원, 축성(築城)과 제방공사의 노역에 투입했고 그 대가로 승려자격을 인정하는 도첩(度牒)을 발급하기까지 했다.

1백 50년 이상 권력에 의해 박해받던 불교는 1550년(명종5년) 문정왕후의 도움으로 선․교 양종과 승과(僧科)가 부활되어 재흥(再興)의 기회를 맞았다. 보우(普雨)를판사로 삼아 승과(僧科)가 실시되었으며 교단은 일시적으로 활기가 일어났다. 이로 인해 조선중기 불교중흥의 주역이었던 휴정(休靜)과 유정(惟政)이 배출된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문정왕후의 죽음과 함께 보우스님이 유자(儒者)들에 의해 요승(妖僧)으로 몰려 제주도에서 장살(杖殺:565)되고 이후 다시 교계는 침체에 빠지고 말았다.

조선시대 불교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꼽히는 의승군(義僧軍)의 궐기와 국난극복을 위한 전쟁참여는 선조25년(1592) 임진왜란 발발로 일어났다. 당시 문약(文弱)했던 정부는 외적의 침입 앞에 변경 신의주까지 몽진하는 사태를 당하자 묘향산에서 수도하던 청허휴정(淸虛休靜)과 금강산에 있던 그의 제자 송운유정(松雲惟政)은 수천의 승군을 조직 국난 극복에 나선 것이다. 권력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민생을 위해서는 칼을 빼어든 것은 한국불교의 역사적 전통인 호국불교의 절정이었다. 승려들의 이 같은 활동은 정부의 불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됐지만 숭유억불정책을 전환시키지는 못했다.

하지만 불교 내적으로 볼 때 승병활동은 불교의 사회적 위신향상과 유능한 인재흡수의 계기가 됐다. 조선중기 이후 양대문파를 이룬 휴정(休靜)문파와 부휴(浮休)문파의 번성과 교학(敎學)의 활기 등은 어려운 상황아래서 불교의 명맥을 이어온 원동력이 됐다.

조선시대의 불교는 과거에 비해 교리연구나 사상적 발전이 전반적으로 위축을 면하지 못했다. 신라의 원효, 고려의 지눌과 같은 고승이 배출되지 않았다. 조선시대 불교계의 가장 높은 봉우리로 일컬어지는 휴정(休靜)도 이에는 미치지 못한다.

조선시대 불교사상의 특징은 유자(儒者)들의 배불론에 대응해 '삼교융합론'이 일어났던 사실이다. 조선초기의 고승 함허당(涵虛堂)의 《현정론(顯正論)》 휴정의 《삼가귀감(三家龜鑑)》등은 이와 관련된 대표적 저술들이다. 명종시대 불교중흥을 꾀했던 보우(普雨)나 기타 고승들의 문집(文集)에서도 이같은 경향은 나타나고 있다. 이는 억불정책 아래서 자구(自救)를 위한 노력의 하나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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