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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산선문12

철감 도윤(澈鑒道允, 798∼868) 철감 도윤(澈鑒道允, 798∼868) 신라말 사자산문의 개산조이다. 속성은 박씨로서 어머니가 신이한 빛이 방안을 가득 채우는 태몽을 꾸고 태어났다고 한다. 18세에 출가하여 황해도 귀신사에서 《화엄경》을 공부했으나 원돈(圓頓)을 가르치는 화엄이 심인(心印)을 전하는 선(禪)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여 825년에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마조 도일(馬祖道一)의 제자인 남전 보원(南泉普願)을 찾아가니, 남전 보원 스님은 한 눈에 도윤 스님이 법기(法器)임을 알고 그에게 심인을 전한 뒤 ‘중국의 법이 신라로 간다’고 탄식했다 한다. 847년(문성왕 8)에 범일(梵日) 스님과 함께 귀국하여 금강산에 머물면서 후학을 지도했는데, 경문왕도 그 때 그에게 귀의하였다. 그 뒤 다시 쌍봉사로 가서 종풍(宗風)을 떨치.. 2012. 10. 7.
구산선문(九山禪門)의 개창 구산선문(九山禪門)의 개창 통일신라 후기에 접어들자 한국에는 선법이 전래되어 새로운 불교를 태동시켰다. 선은 중국에서 달마이래 종풍이 확립되어 종파로 성립 발전한 것으로 6조 혜능(慧能)에 이르러 남돈선(南頓禪)과 신수(神秀)의 북종선(北宗禪)으로 나누어졌다. 우리나라에는 북종선이 전래되었다는 흔적만 있을 뿐 그 자취를 알 수 없고 오직 남돈선 계통만이 크게 유포되었다. 남돈선을 처음으로 전래한 사람은 784년 입당(入唐)해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 서당지장(西堂智藏)에게서 심인(心印)을 얻어 귀국한 도의(道義)였다. 그는 귀국 후 선법을 크게 일으키려하였으나 당시 신라에서는 선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므로 설악산에 은거하면서 제자 염거(廉居)에게 법등을 전했다. 염거는 다시 체징(體澄)에게 법맥을 전했는데.. 2011. 12. 9.
봉림산문(鳳林山門) 봉림산문(鳳林山門) 신라말 선승 현욱(玄昱)의 제자 심희(審希)가 효공왕때 경남 창원 봉림산에 봉림사를 세우고 개창한 산문. 현욱은 헌덕왕때 당나라에 가서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인 장경회휘(章敬懷暉)로부터 법을 전수받았다. 희강왕 2년인 837년 귀국했다. 처음에 실상사(實相寺)에 있다가 혜목산(慧目山) 고달사(高達寺)에서 크게 선풍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혜목산선사라고 불렸다. 이러한 현욱의 뒤를 이은 심희는 창원 봉림산에 절을 짓고 종풍을 드날렸다. 하지만 스승인 현욱이 머물던 혜목산을 따서 혜목산문이라고도 한다. 스승과 제자가 사자상승(師資相承)하여 구산선문의 일파를 개산한 것이다. 심희가 입적하자 신라 경명왕(景明王)이 직접 애도문을 지을 정도로 명망이 드높았다. 제자로는 경질(景質) 융제(融諦).. 2011. 4. 5.
동리산문 동리산문 신라 문성왕(文聖王)때 선사 혜철(慧徹)이 전남 곡성(谷城) 동리산(桐裡山)에 태안사(泰安寺)를 창건하고 개산한 선문. 혜철은 814년에 당나라에 가서 서당지장(西堂智藏)에게 법을 배웠다. 839년 귀국해서 동리산문을 열었다. 도선(道詵)국사 여(如)선사등 기라성같은 제자를 거느렸다. 도선국사는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개조로 고려건국에도 깊이 관여했다. 역대 제왕들의 추앙을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동리산문을 이끌어 간 사람은 여(如)선사였다. 아마도 도선이 풍수지리와 정치에 발을 디디면서 자연스럽게 산문은 여선사에게 바통이 이어진 것 같다. 그는 동리산문을 이어 가다가 제자인 광자윤다(廣慈允多)에게 법을 넘겼다.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 화엄사의 말사다. 현재 대웅전 보제루(普濟樓).. 2011. 3. 13.
성주산문 성주산문 신라 문성왕때 고승 무염(無染)이 충남 보령 성주사(聖住寺)에서 개창한 산문. 무염은 태종 무열왕의 8대손인 왕족이었다. 무염은 821년 당나라에 가서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인 마곡보철(麻谷寶徹)에게 법을 배웠다. 그때 중국 사람들은 그를 동방대보살(東方大菩薩)이라고 추앙했다. 845년 귀국하여 왕자 흔(昕)의 요청을 받고 오합사(烏合寺)에 자리를 잡았다. 이 오합사가 후일 성주사(聖住寺)로 바뀐다. 무염은 경문왕과 헌강왕으로부터 국사로 받들어 졌다. ‘무설토론(無舌土論)’을 지어 선풍을 크게 떨쳤다. 무염의 제자로는 심광(深光) 현휘(玄暉) 활행(闊行) 대통(大通) 등이 유명하다. 관련글 : 구산선문(九山禪門) 희양산문 사굴산문 가지산문 수미산문 실상산문 사자산문 2011. 3. 11.
실상산문 실상산문 구산선문중의 하나로 신라 흥덕왕때 홍척(洪陟)이 전북 남원(南原)에 실상사(實相寺)를 창건하고 세운 산문(山門)이다. 홍척은 당나라로 건너가 유명한 선승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인 서당지장(西堂智藏)에게서 법을 배웠다.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종조(宗祖)인 도의(道義)와 같은 스승밑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도의보다 늦게 귀국했다. 하지만 도의보다 먼저 산문을 열었다. 구산선문 중 제일 먼저 테이프를 끊은 영광을 얻은 것이다. 2011. 3. 8.
오교구산 오교구산 삼국시대때 들어온 불교는 통일신라에 들어서 본격적인 비상의 나래를 펴기 시작했다. 경전을 중심으로한 교종은 물론 선종의 계파들도 활발하게 종파를 건설하고 포교를 시작했다. 이때의 교선 양대종파들은 5교(敎)와 9산(山)이란 이름아래 교세를 넓혀 나갔다. 이른바 오교구산(五敎九山)의 시대인 것이다. 5교는 교학을 바탕으로 한 교종의 5대종파다. 구산은 선학을 바탕으로한 선종의 9대종파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 불교의 교세로 볼 때 종파라기 보다는 학종(學宗)에 가깝다고 보는게 옳을 것 같다. 특히 오교는 삼국시대말부터 태동을 시작한 반면 구산은 나말여초(羅末麗初)에 이르러서야 뼈대를 갖추기 시작했다. 선교후선(先敎後禪)인 셈이다. 오교는 열반종(涅槃宗) 계율종(戒律宗) 법성종(法性宗) 화엄종(華嚴.. 2011. 2. 25.
수미산문 수미산문 수미산문은 고려초 태조 15년인 932년에 이엄(利嚴)이 해주 수미산(須彌山) 광조사(廣照寺)에서 문을 연 산문이다. 개산조 이엄은 진성여왕 10년인 896년에 중국으로 건너가 운거도응(雲居道膺)으로부터 법을 배웠다. 911년 귀국하여 영동 영각산(靈覺山)에 머물면서 선풍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고려 태조의 명으로 궁에 들어가 스승의 예를 받았다. 이에 태조 왕건은 해주 수미산에 광조사를 지어 이엄이 머물수 있도록 했다. 제자로는 처광(處光) 도인(道忍) 경숭(景崇) 등 여러 고족제자들이 뒤를 이어 나왔다. 관련글 : 구산선문(九山禪門), 희양산문, 사굴산문, 사자산문, 가지산문 2011. 2. 19.
가지산문 가지산문 전남 장흥(長興) 가지산(迦智山) 보림사(寶林寺)를 중심으로 종풍(宗風)을 일으켰다. 개조(開祖)는 도의(道義)다. 도의는 일찍이 출가하여 당나라로 가서 서당지장(西堂智藏)에게 법을 배웠다. 그러나 당시 풍토가 산문을 열기에 마땅치 않자 제자 염거(廉居)에게 법을 전했다. 염거는 다시 체징(體澄)에게 전법했다. 840년 당나라에서 돌아온 체징이 보림사를 세우고 가지산문을 열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지은 일연(一然)도 이 가지산문의 승려다. 보림사는 현재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로 남아 있다. 인도 가지산의 보림사, 중국 가지산의 보림사와 함께 3보림이라 일컬어졌다. 경내에는 국보 제44호인 3층석탑 및 석등, 국보 제117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제155호인 동부도(東.. 2011. 2. 17.
사자산문 사자산문 신라말의 고승 쌍봉선사(雙峰禪師) 도윤(道允)과 그의 제자 절중(折中)에 의해 개창된 산문이다. 도윤은 825년 당나라로 건너가 남전보원(南泉普願)에게서 법을 배웠다. 847년 귀국해서 능주(綾州?화순) 쌍봉사(雙峰寺)에서 크게 선풍을 일으켰다. 도윤의 뒤를 이은 절중(折中)이 영월 사자산(獅子山) 흥녕사(興寧寺)에 자리를 잡고 산문을 열었다. 신라말기 징효(澄曉)때 가장 번창했다. 944년에 건립된 그의 탑비인 영월흥녕사징효대사탑비(寧越興寧寺澄曉大師塔碑)는 보물 제612호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흥녕사는 891년 화재로 사라진뒤 944년 다시 중건했으나 역시 화재로 회진되었다. 이후 1천년이 넘도록 폐사로 있었다. 이후 1902년 비구니 대원각(大圓覺)이 중건하고 법흥사(法興寺)로 이름을 바.. 2011. 2.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