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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128

고봉태수(高峰泰秀,1901-1969) 고봉태수(高峰泰秀,1901-1969) 근대 대강백(大講伯), 용성진종(龍城震鐘)스님의 제자, 본관은 진주(晋州) 성은 姜씨, 황해도 장연사람. 어려서 선유숙(仙遊塾)에서 한학을 배우고 13세에 5살위인 부인과 혼인하였으나 17세에 부인이 죽다. 그뒤 포목상으로 전전하다가 25세에 대각사(大覺寺) 용성(龍城)스님에게 출가하다. 도봉산 망월사 만일결사도량, 양산 내원사 등에서 정진하고 그후 금강산 마가연‧석왕사등 선원에서 정진하여 깨달음을 얻다. 후에 해인사, 통도사 전문강원에서 경전을 열람하다. 1943년 해인사 강사에 취임하고 이어 은해사 강사로 초빙받아 그곳에서 만공월면스님과 더불어 선문답(禪問答)을 나누기도 하였다. 스님은 술을 마시면서도 취하는 법이 없었고 여자를 택하면서도 집착하지 않아 사람들은 .. 2011. 9. 10.
아육왕(阿育王) 아육왕(阿育王) 梵語 의 音譯. 인도 마우리아왕조의 제3대 왕(재위 BC 272?~BC 232?). 한역불전(漢譯佛典)에는 아육왕(阿育王)․아수가(阿輸迦)로 기록되어 있다. 할아버지 찬드라굽타(旃多掘多大王)와 아버지 빈두사라(賓頭沙羅)의 2대에 걸쳐 구축한 영토를 계승하고, 남쪽으로는 마이소르에 이르는 인도의 대부분과 아프가니스탄의 남부를 지배하여 인도 고대사상 최대의 제국이 되었다. 그 도읍은 파탈리푸트라(지금의 비하르주 파트나)였다. 갠지스강 중류지역의 농업지대를 제국의 경제적 기반으로 했으며 당시 상당히 발달되었던 여러 지대를 연결하는 교통로와 무역을 손안에 넣었다. 즉위 9년째에 카링가(지금의 오리사주 해안부)를 정복하였는데 그때 많은 사람을 죽였다. 왕은 이 전쟁의 비참함을 반성하여 불교를 더 .. 2011. 9. 5.
백운(白雲 ?~1072) 백운(白雲 ?~1072) 법명은 수단(守端), 속성은 갈(葛)씨. 양기방회(楊岐方會) 선사의 법맥을 이었다. 여러곳에서 교화하였으나 주로 서주(徐州) 백운산에 있었다. 송나라 희녕(熙寧) 5년에 입적하였다. 2011. 9. 1.
석문남곡(石門南谷) 석문남곡(石門南谷) 스님은 1913~1983. 현대의 스님으로서 법호는 석문(石門), 아호(雅號)는 남곡(南谷)이며, 법명은 윤명(允明)이다. 속성은 김해김씨(金海金氏)이고 속명은 남현(南鉉)이며, 전북 고창 출생으로서 아버지는 용기(龍基), 어머니는 이인촌(李仁村)이다. 1931년에 장성 백양사(白羊寺)에서 영호(映湖) 스님을 은사로, 만암(曼庵) 스님을 계사로 득도하고 1934년 만암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이듬해 백양사 강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졸업하고 백양사 선원에서 불법을 닦다가 광복과 함께 선운사 주지에 임명되었다. 특히 불교정화운동이 격렬했던 1963년에는 양설을 화합시키는 데 주력하였으며 이어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의 재무부장ㆍ교무부장, 동국학원(東國學院) 이사, 조계사(曹溪寺) 주지.. 2011. 7. 22.
경봉정석(鏡峰靖錫,1892-1982) 경봉정석(鏡峰靖錫,1892-1982) 통도사스님, 성해남거의 제자. 경봉은 호, 시호는 원광 본명은 김용국. 밀양사람. 1892년(고종29) 밀양군 부내면 계수동에서 부 김영규 모 안동권씨 사이에서 태어나다. 7세에 밀양읍의 한문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하다. 16세에 양산 통도사 성해에게 출가하고 명신학교를 거쳐 1912년 해담율사에게 구족계를 수지하다. 통도사 강원을 나오고 순회포교사로 전국을 다니며 포교하고, 1925년 통도사 념불만일회 회장이 되어 30여년간 주도하다. 이후 제방을 편력하며 당대의 선지식을 참방하고 통도사 극락암에서 눕지않고 앉아서 참선에 몰두, 마침내 36세인 1927년 11월 20일 삼경에 견촉무하고 대도를 성취하다.(我是訪吾物物頭 目前卽見主人樓 呵呵逢着無疑惑 優鉢花光法界流:悟道頌).. 2011. 7. 10.
감지승찬(鑑智僧璨, -606) 감지승찬(鑑智僧璨, -606) 중국선종 제3조, 출가전에 풍질(風疾)이 있었는데 2조 혜가와 문답왕래(問答往來)로 풍질이 공불가득(空不可得)임을 깨닫다. 출가하여 2조 혜가를 시봉하기 2년 뒤 혜가(慧可)의 법을 받고, 서주 사공산(舒州 司空山)에 들어가다. 그즈음 북조무제(北周武帝)의 파불스님(破佛 574)을 만나 동주 환공산(同州 皖空山)에 숨어서 10여년을 지내다. 수개황 13년(隋開皇 593) 도신(道信)에게 의발(衣鉢)을 전하고 라부산(羅浮山)에 들어가 은거(隱居)하기 3년, 그뒤 대업2년 (大業2년) 제자들과 함께 대재(大齋)에 나아가 한 나뭇가지를 들어 보이며 법문을 마치고 엄연히 시적(示寂)하다. 임종에 이르러 말하기를 “나는 본래 (사라왕여래(娑羅王如來)로서 이 사바세계에 3번 다녀간다... 2011. 7. 4.
각범혜홍(覺範惠洪,1071-1128) 각범혜홍(覺範惠洪,1071-1128) 송대 임제종 황룡파, 서주(강서성) 고안현사람 성은 팽씨, 이름은 혜홍 또는 덕홍, 자는 각범. 14세에 출가하여 삼봉관선사의 시자가 되고 다음으로 보봉극문을 참예하여 7년을 지내다. 숭녕년간(1102-1106)에 무주 경덕사에 있다가 서주 청량사에 이주하다. 마침 간승의 참소를 만나 옥사를 당하고 정화원년(1111) 다시 국외로 쫒겨나고 뒤에 세번째 옥에 갇히었다. 상서남대에 명백암을 짓고 살면서 [선림승보전 30권]을 짓다. 흠종이 즉위하자 곧 칙명으로 다시 머리를 깎고 본이름을 다시 부르게 하였다. 금나라의 난을 만나 암자에 퇴거해 있다가 남송 건염2년 5월 입적. 세수 58세, 시호는 보각원명. (속전등록22, 통재29, 日元17, 계고략4, 오등엄통17) 저.. 2011. 6. 30.
만공선사 (滿空禪師) (1871~1946) 만공선사 (滿空禪師) (1871~1946) 근대의 고승. 여산송씨. 속명은 도암(道巖), 법호는 만공(滿空), 월면은 법명. 전라북도 정읍출신. 신통(神通)의 아들이다. 1883년 김제 금산사에서 불상을 처음 보고 크게 감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출가를 결심하고, 공주 동학사(東鶴寺)로 출가하여 진암(眞巖) 문하에서 행자생활을 하였다. 1884년 경허(鏡虛)의 인도로 서산 천장사(天藏寺)로 가서 태허(泰虛)를 은사(恩師)로, 경허를 계사(戒師)로 삼아 사미십계(沙彌十戒)를 받고 득도하였다. 그뒤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萬法歸一 一歸何處)."라는 화두(話頭)를 가지고 참선에 열중하였다. 1895년 아산 봉곡사(鳳谷寺)에서 새벽에 범종을 치면서 "법계의 본성을 관찰하여야 한다. .. 2011. 6. 16.
고봉(高峰 1238~1295) 고봉(高峰 1238~1295) 속성은 徐氏이며 법명은 원묘(原妙)이고, 법호는 고봉(高峰)이다. 南宋말기에 태어나 元나라 초기까지 일생을 보냈다. 고봉스님은 육조혜능 문하 23대이며, 임제문하 17대 적손이다. 15세에 출가, 17세에 具足戒를 받았고, 18세부터 天台敎를 배웠다. 20세에 지금까지의 敎宗에서 禪宗으로 수행노선을 바꾸고, 3년의 죽음의 기간(死限)을 정하여, 몸도 씻지 않고 머리도 깎지 않고 자리에 눕지도 않는 각고의 정진에 몰입하다. 21세때 단교묘륜 禪師에게서 “만법귀일 일귀하처? 만가지 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의 화두를 받았고, 설암조흠 禪師에게서 “무엇이 너의 송장을 끌고왔는가?”의 화두를 받았다. 24세때 3월 16일, 일찍이 단교 화상에게서 받은 “만.. 2011. 6. 10.
월칭 월칭 7세기경 인도의 승려로 중관파(中觀派) 귀류논증법(歸謬論證法)의 비조다. 범어로 찬드라키르티. 남인도 사만타국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애는 오로지 티베트의 전승에 의해서만 알수 있다. 어려서 출가해서 경(經) 율(律) 론(論) 삼장(三藏)에 달통했다. 청변(淸弁)의 제자와 불호(佛護)의 제자 카마라붓디에게 용수(龍樹)의 저작을 배웠다. 이후 날란다사원에 가서 좌주(座主)가 되었다. 만년에는 남인도 콘카나지방에 가서 전도활동에 전념했다. 그런데 밀교계통의 아사리(阿?梨)들은 월칭이 300년동안이나 살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진언과 주문을 통해 장생불로(長生不老)의 도(道)를 얻었다는 얘기다. 그의 철학적 입장은 청변(淸辯)을 비판하고 불호(佛護)를 옹호하는데 섰다. 말하자면 공성(空性)을 논.. 2011. 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