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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128

월초거연(月初巨淵,1858-1934) 월초거연(月初巨淵,1858-1934) 근대 스님, 교육가. 서울태생 성은 홍(洪)씨. 15세에 송릉리 부도암 환옹(幻翁)에게 득도하고, 32세까지 제방 강원, 선원에서 수행하다. 1900년 고양군 은평면에 수국사(守國寺)를 창건하고, 고종(高宗)의 동궁이 아플 때 운문사 사리굴(雲門寺 舍利窟)에 백일기도로 쾌차케 한 공덕으로 불사를 완성하다. 1906년 동대문 밖 원흥사(元興寺)에 명진학교(明進學校)를 열어 승려교육에 힘쓰니 동국대학교(東國大學)의 효시이다. 1913년 봉선사(奉先寺) 주지에 추대되고, 1927년 사재를 들여 개운사 강원(開運寺 講院)의 설립을 도우고, 1934년 봉선사에 홍법강원(弘法講院)을 설립 운허(耘虛)스님을 강사로 승려교육에 힘쓰다가 그해 4월 봉선사에서 입적하다. 행장비(行狀碑.. 2011. 11. 24.
운허용하(耘虛龍夏,1892-1980) 운허용하(耘虛龍夏,1892-1980) 근대 대강백, 대장경 한글화의 주역. 평북 정주사람, 성은 李씨 속명은 학수(學洙), 춘원(春園) 이광수의 재종제(再從弟). 어려서 향리에서 한학과 현대학문을 수업하고, 1912년 한일합방에 항거하여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참여하다. 1921년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하다가 강원도 희양군 봉일사(鳳逸寺)로 피신하였다가 경송(慶松 월초:1858-1934,의 제자)에게 득도하다. 그뒤 범어사, 개운사 등지에서 8년간 교학을 공부하다가 다시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합류하여 교육사업에 진력하다. 1932년 다시 귀국, 봉선사 홍법강원(弘法講院)에서 36년부터 강석(講席)에 앉다. 1946년 광동학교(廣東學校)를 개설하고 한국전쟁이후 범어사, 통도사, 해인사 등에서 강주(講.. 2011. 11. 20.
단하천연(丹霞天然,739-824) 단하천연(丹霞天然,739-824) 당대 (唐代) 스님, 석두희천(石頭希天)의 법사(法嗣). 그는 장안(長安)에 관리가 되려고 갔다가 한 선승을 만나 마조(馬祖)에게 찾아가서 승려가 되다. 그 후 석두의 법을 잇다. 그가 낙양(洛陽)의 혜림사에 머물 때 추운 겨울날 법당의 목불(木佛)을 꺼내 불을 지폈다.(단하소불 丹霞燒佛) 그 때 원주(院主)왈, ‘그럴 수가 있느냐?’하니 사(師)가 ‘나는 부처님을 태워서 사리(舍利)를 얻으려고 하오’ 원주,‘목불인데 어찌 사리가 있겠는가?’ 師왈,‘사리가 안나올 바에야 나무토막이지 무슨 부처이겠는가?’하다. 말년(末年)에 그는 등주(鄧州) 단하산(丹霞山)에 살다가 86세에 門人들에게 목욕하게 하고 갓쓰고 지팡이를 들고 나앉으며,‘ 자 나는 간다. 신을 신켜다오’하고 신.. 2011. 11. 20.
남천보원(南泉普願,748-834) 남천보원(南泉普願,748-834) 당대 남악하, 정주(하남성) 신정사람 성은 왕씨. 지덕2년(757) 대외산 대혜에게 출가하고, 대력12년(777,30세) 숭악에 가서 수구하다. 처음에 성상, 삼론 등을 공부하다가 현기는 경론의 밖에 있다는 의지를 생각하고, 마조문하에 참예하여 법을 잇다. 정원11년(795) 지양(안휘성)의 남천산에 선원을 짓고 스스로 ‘왕로사’라 칭하며 30년간 하산하지 않고 논밭을 일구며 주하니 학인이 항상 모여 성황을 이루다. 태화초년에 前太守 육긍의 귀의를 받고, 문하에 조주종심, 장사경잠, 자호이종 등의 뛰어난 제자를 두다. 태화8년 12월 87세로 시적. 사는 특히 학인을 접화하는 방편어가 뛰어나 ‘남천참묘, 남천수고牛, 남천목단’등의 공안이 있다.(송고승전11, 조당집16,.. 2011. 10. 27.
장경호(張敬浩:1899-1975) 장경호(張敬浩:1899-1975)거사 실업가, 불교 대중화 운동의 선구자. 자호는 대원(大圓), 본관은 仁同. 1899년 9월 7일 부산 동래구 사중면 초량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張允植, 어머니는 文念伊. 신심이 돈독했던 어머니를 따라 7세에 불교에 귀의했다. 14세에 普城高普에 진학했으며 18세에 秋命順(법명은 積善華)과 결혼하였다. 1919년 보성고보를 졸업하고, 3.1독립운동에 참가했다. 그 뒤 日警을 피해 친구 許 政(정치인)과 함께 숨어 다니다가 일본으로 도피했다. 이듬해 귀국, 신앙이 더욱 깊어져 1925년 通度寺의 동안거에 동참하여 九河天輔(1872-1965)로부터 법문을 듣고 禪을 배웠다. 안거 해제일에 ‘商業에 종사하여 돈을 크게 벌어 불교에 바치겠다’고 맹서하고, 근검절약하며 사업을.. 2011. 10. 14.
덕진(德眞 ?~1888) 덕진(德眞 ?~1888) 조선시대 스님. 호 : 허주(虛舟) 조계산에서 출가. 학문을 성취, 도를 통하다. 사람을 피하여 송광, 선암, 동리, 칠불, 불일, 능가, 백운, 두륜, 달마, 가지, 백양 등 명찰에서 지내다 다시 서울로 갔다가 대원군의 청으로 철원 보개산 초암과 지장암에서 기도 불사를 행하다. 가는 곳마다 4부대중이 운집, 의식이 항상 밀리다. 근세에 이름난 선객. 2011. 10. 10.
나후라 나후라 부처님의 아들로 밀행제일(密行第一)로 불렸다. 남이 보든 말든 자신의 수행을 묵묵히 행했다고 해서 이런 칭호가 붙었다. 나후라의 원래의 뜻은 석가모니가 아들을 놓고 한탄하면서 장애(障碍) 즉 나후라라고 이름지었다 한다. 또다른 이야기로는 나후라아수라왕(羅?羅阿修羅王)이 달을 가릴 때 태어나서 나후라라고 했다고 한다. 범어로 라훌라다. 부처님은 사리불을 시켜 어린 나후라를 출가시키도록 했다. 최초의 사미(沙彌)인 것이다. 20세에 비구계를 받았다. 후일 나후라는 법회회상에서 도칠보화여래(蹈七寶華如來)의 수기를 받았다. 관련글 : 라후라(羅睺羅) 2011. 10. 10.
남양혜충(南陽慧忠, -775) 남양혜충(南陽慧忠, -775) 唐代스님, 월주제기사람, 성은 염씨. 어려서 육조혜능(六祖慧能)을 따라 배우고 그의 법을 잇다. 六祖 입적후에 여러 산에 두루 住하였는데 五嶺‧羅浮山, 四明‧天目山을 거쳐서 南陽의 白崖山 黨子谷에 들어가 40여년을 山門 밖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上元2년(761) 숙종이 그의 名聲을 듣고 詔勅을 내려 서울로 불러 스승의 禮로 맞게 하다. 玄宗,肅宗,代宗의 두터운 歸依를 받았으나 항상 淡泊한 本性 그대로 天眞自然을 즐기었다. 항상 南岳慧思의 宗風을 사모하고, 朝廷에 奏請하여 均州 武當山에 太一 延昌寺를, 黨子谷에 香嚴 長壽寺를 창건하고 大藏經 一部를 모시었다. 혜충은 行思, 懷讓, 神會, 玄覺 등과 함께 慧能門下의 五大宗匠으로 그의 禪風은 특히 달랐는데 당시 敎界에 光彩를 발하.. 2011. 10. 9.
남악회양(南岳懷讓,677-744) 남악회양(南岳懷讓,677-744) 당대스님 육조의 적자, 금주안강(섬서성 한음현치)사람 성은 두(杜)씨, 휘는 회양 시호는 대혜大慧 탑호는 최승륜지탑(最勝輪之塔). 15세에 형주의 옥천사 홍경율사에게 중이 되고 동학인 탄연의 권고로 숭산혜안을 만난 뒤 혜능에게 참예하여 六祖云,‘從什麽處來’ 師云,‘從嵩山安國師處來’ 조운,‘是什麽物恁麽來’ 師罔措 於是執侍八年 方省前話 乃告師云,‘懷讓會得當初來時 和尙接某甲 是什麽物恁麽來’ 조운,‘儞作麽生會’ 사운,‘說似一物卽不中’ 조운,‘還假修證否’ 사운,‘修證不無 染汚不得’ 조운,‘祗此不染汚 是諸佛之所護念 汝亦如是 吾亦如是 乃至西天諸祖亦復如是’(전등록5‧南岳讓章) 심인(心印)을 깨닫고 법을 잇다. 713년 남악 반야사 관음대에서 30년동안 있으면서 선풍을 선양하다. 당천보.. 2011. 10. 7.
나옹혜근(懶翁慧勤,1320-1376) 나옹혜근(懶翁慧勤,1320-1376) 고려때스님, 이름은 원혜(元惠) 법명은 혜근 호는 나옹, 또 江月軒이라 했고 성은 牙씨, 寧海사람. 태어나면서부터 골상(骨相)이 비범하고 영특하였다. 20세때에 이웃동무가 죽는 것을 보고 어른들에게,‘죽으면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으나 아는 이가 없으므로 功德山 妙寂庵(지금의 사불산 윤필암 四佛山 潤筆庵)의 了然선사에게 가서 祝髮得度하다. 了然이 나옹에게, ‘네가 여기에 온 주인공 그것이 무었이냐?’라 물으니 나옹은,‘능히 말하고 듣는 그것이 왔습니다. 그러나 보려해도 볼 수 없고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읍니다. 어떻게 닦아야 하겠읍니까?’ 하니 요연이,‘나도 너와 같이 말도 하고 듣기도 하는 그 주인공을 알지 못한다. 다른 곳에 가서 가르침을 찾아보라.’고 하였다... 2011.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