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257 주지 주지 절집의 최고 책임자를 이르는 말이다. 대개 당나라 초기 선종이 형성되어 가는 중에 생긴 소임이다. 백장청규(百丈淸規)가 생기고 선승(禪僧)이 늘어나면서 절집을 관리감독할 필요가 생겼다. 말하자면 사찰의 시스템을 제어할수 있는 리더가 주지인 셈이다. 주지란 말도 절집에 머물러서 계율을 지키는 사람이란 의미다. 불교역사의 과정중에 절은 혁명과 반란을 꿈꾸던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던 산중의 저자거리같은 곳이었다. 그러자면 누군가 교통정리할 존재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바로 그 어른이 주지다. 조실(祖室): 절집의 최고 어른을 지칭하는 말이다. 사찰의 정신적 지도자로 대개 큰 스님을 이른다. 방장(方丈): 총림의 조실스님을 이르는 말이다. 사방 1장(丈)의 방에 있다고 해서 방장이다. 2012. 3. 12. 절 절 흔히 절이란 절하러 가는 곳이란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한다. 그만큼 불교에서 절은 필수불가결의 예절처럼 통용된다. 비록 교리나 설법을 알아 듣지 못해도 지극정성의 절공양은 어느 수행보다도 값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어느 절에 가서 몇천배를 했다는 말을 항다반사(恒茶飯事)로 듣게 된다. 그리고나서 효험과 이적(異蹟)을 보았다는 스토리가 뒤를 잇는다. 이러한 절시스템은 불교만의 독특한 구도와 간구의 수행법이다. 일반적으로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를 알현할 때는 삼배(三拜)를 한다. 이것은 삼업(三業)을 바쳐서 예경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조석예불시에는 칠배(七拜)를 한다. 그때 일배는 석가모니불께, 이배는 모든 부처님께, 삼배는 거룩한 법보께, 사배는 문수 보현 관음 지장등 많은 보살님께.. 2012. 3. 10. 진언종 진언종 진언종의 뿌리는 밀교(密敎)다. 중국 진언종은 7, 8세기때 승려인 선무외(善無畏), 금강지(金剛智), 불공(不空)이 씨를 뿌렸다. 물론 이전에도 중국에 밀교는 있었다. 하지만 기복과 호신을 비는 잡밀(雜密)이었다. 순밀(純密)의 전래는 이들 세 승려때부터이다. 진언종의 근본경전은 선무외가 번역한 ‘대일경(大日經)’과 불공이 번역한 ‘금강정경(金剛頂經)’이다. 밀교에 대척되는 종교는 현교(顯敎)라 불렀다. 밀교가 등장하기 이전의 종교인 것이다. 밀교가 일승교(一乘敎)라면 현교는 삼승교(三乘敎)다. 또 밀교가 실교(實敎)라면 현교는 권교(權敎)라고 풀었다. 밀교는 돈교(頓敎)이고 현교는 점교(漸敎)라고 해석했다. 이러한 것을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고 한다. 또한 밀교는 대일여래의 지혜를 나타내는 금.. 2012. 3. 2. 지제(支提 Caitya) 지제(支提 Caitya) 유골을 묻지 않고 다만 특별한 영지(靈地)임을 표시하기 위하거나, 또 는 그 덕을 앙모하여 은혜를 갚고 공양하는 뜻으로 세워진 것 2012. 3. 1. 지전 지전 병법을 보좌해서 일을 처리하는 소임. 아울러 불전(佛殿)을 담당하는 소임을 이른다. 의식을 집행하고 향불을 켜거나 화재를 예방하는 등 불전의 전반을 관리 감독한다. 또 부전이라고도 하며 대웅전이나 다른 법당을 맡은 이를 노전스님이라고 하여 불단을 맡은 부전과 구별한다. 관련글 : 부전 2012. 2. 29. 자비희사 (慈悲喜捨) 자비희사 (慈悲喜捨) 이 네 가지를 사무량심(四無量心)이라 함. 즉 한없는 중생을 자비롭게 여기는 네 가지 마음. 관련글 : 사무량심(四無量心) 사섭법 (四攝法) 희사(喜捨) 2012. 2. 21. 조선후기 불교 조선후기 불교 조선후기의 명승으로는 연담(蓮潭:1720~1799), 백파(白坡: 1767~1852)등이 있다. 연담은 각종 사기(私記)를 저술해 교학 진흥에 크게 기여했으며 백파는 《선문수경(禪門水鏡)》등을 지어 선문중흥에 기여했다. 또 초의(草衣)는 내외학문에 정통한 고승으로 유학자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범해(梵海)는 불교인명사전이라 할 수 있는 《동사열전(東師列傳)》을 썼다. 이밖에도 진하(震河)는 《선문재정록(禪門再正錄)》을 지어 여래선․조사선을 밝힘으로써 종풍을 떨치기도 했다. 이에 비해 조선후기의 불교상황은 승려의 사회적 신분저하로 도성출입마저 자유롭지 못한 형편이었다. 이 치욕적인 법령은 1895년 일본승려들의 탄원에 의해 해제되었지만 오랜기간 탄압에 의해 자립의 힘을 잃은 불교계는 근대사회로 .. 2012. 1. 31. 조선후기 불교 조선후기 불교 조선후기의 명승으로는 연담(蓮潭:1720~1799), 백파(白坡: 1767~1852)등이 있다. 연담은 각종 사기(私記)를 저술해 교학 진흥에 크게 기여했으며 백파는 《선문수경(禪門水鏡)》등을 지어 선문중흥에 기여했다. 또 초의(草衣)는 내외학문에 정통한 고승으로 유학자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범해(梵海)는 불교인명사전이라 할 수 있는 《동사열전(東師列傳)》을 썼다. 이밖에도 진하(震河)는 《선문재정록(禪門再正錄)》을 지어 여래선․조사선을 밝힘으로써 종풍을 떨치기도 했다. 이에 비해 조선후기의 불교상황은 승려의 사회적 신분저하로 도성출입마저 자유롭지 못한 형편이었다. 이 치욕적인 법령은 1895년 일본승려들의 탄원에 의해 해제되었지만 오랜기간 탄압에 의해 자립의 힘을 잃은 불교계는 근대사회로 .. 2011. 12. 30. 중국불교의 전래 중국불교의 전래 중국불교는 후한(後漢)의 명제(明帝)때인 영명(永明) 10년(A.D.67년) 대월씨국(大月氏國)에서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난(竺法蘭)이 낙양에 와서 ≪42장경(章經)≫을 번역한 것이 최초라고 한다. 그러나 중국은 B.C.2세기 말에 전한(前漢)에 의한 서역경영(西域經營)의 결과로써 서역인들에 의해 서서히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가 전래되던 초기 한민족(韓民族)은 유교를 국시로 하고 그 문화전통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므로 좀처럼 이국의 종교인 불교를 수용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삼국의 동란을 거쳐 서진(西晋)시대가 되자 노장사상이 귀족사이에 번져 나갔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불교는 노장사상에 합치하는 것이라 하여 점점 한민족 사이에 침투하게 되었다. 때문에 당시의 불교는 노.. 2011. 12. 17. 장궤(호궤)합장 불자가 계를 받는 수계식에서 주로 사용하는 무릎을 꿇는 자세인데 일상적으로 두 무릎을 꿇는 자세와는 다른점이 있다. 장궤 자세는 두 무릎을 꿇고 앉되 두 무릎을 땅에 디딘 자세에서 허벅지와 상체가 수직이 되게 곧게 일으켜 세우고 두 발끝은 세워서 발끝으로 땅을 지탱하며 손은 합장을 한 자세를 취한다. 다르마의 스승에 대한 최경례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을 서원하는 자세이기도 하다. 이 자세는 다른 종교에서도 보편적으로 사용된다. 관련글 차수 호궤 2011. 11. 22. 이전 1 ··· 9 10 11 12 13 14 15 ··· 26 다음